소래에서
이명수 ([시집 「등을 돌리면 그리운 날들」에서)
흐린 저녁
너에게로 가는 길이 막막하다
어둠이 길을 뚫고
눈발은 시린 이마에서 희끗거린다
춥다
길을 버리고
너에게로 가는 길은
춥고 어둡다
노을 속으로 잠기는
수인선 협궤열차
너에게로 갈 수 있다면
세상의 길을 버리고
벼랑으로 가리라
흐린 저녁 마른 풀잎 누이며
너에게로 가리라
협궤 수인선
수원에서 인천을 오가며
주변 농어촌 주민들의 숱한 애환을
실어 날랐던 경편(輕便)철도 수인선.
표준궤도(143.5cm)의 절반 76.3cm였던
이 협궤(狹軌)는
1935년 9월 23일 당시 사철(私鐵)이었던
조선경동철도(주)가 착공,
1937년 8월 6일 개통을 보았다.
협궤 수인선은 왜 건설되었는가?
공기가 짧아 비교적 설치가 간단하고
유지·보수비용이 작다는 이점과
투자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지선(支線)철도에 많이 이용되었다.
특히 일제하에서 건설된 철도는
식민지 경영과 대륙침략이라는
정치·경제·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기에
수인선 또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개통 당시에는 중·일 전쟁이 한창일 때
일제는 협궤 수려선(水驢線)으로
여주·이천지역의 쌀을 수원으로 이송하면
다시 협궤 수인선을 통해서
쌀과 함께 경인만(소래·남동·군자) 일대의
염전지대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수산물을 수탈해갔다.
인천항에서 일본 본토는 물론,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의 군량미로 반출하기 위해
급조했던 화물 수송로였던 것.
우리의 땀과 꿈을
탄식과 한숨으로 증발시킨
수탈의 경동맥이었던 것이다.
해방 후,
사철이었던 수인선은
철도청으로 흡수되어
인천만 일대에서 나는 수산물과
수원지역의 농산물을 교류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특히 소래와 군자지역에서 생산되는
천일염 수송이 가장 큰 역할이었다.
수인선은 개통 후 70년대 말까지는
증기기관차로 선로를 달렸는데
77년부터 화물운송이 중단된다.
80년대에 들어와 디젤동차로 바뀌면서
하루 왕복 5차례에서 3차례로 줄어들었다.
다양한 교통수단의 발달로
협궤를 이용하는 승객이 급격하게 줄고
화물운송도 거의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수입·지출의 불균형이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면서
끊임없이 폐선 소문은 입에 오르기 시작하고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어 갔다.
88년 11월, 안산선 전철 개통과 함께
50년 역사의 수인선은 더욱 왜소해졌다.
망둥어를 잡던 선로 주변의 갯벌들이
'시화지구 공단' 조성이란
빠른 속도의 간척사업으로
점차 기존의 모습을 잃어갔다.
92년 7월 20일, 남동역을 폐지하고
종착역을 송도에서 소래로 옮겼다.
그 2년 후인 94년 9월에는
다시 소래·달월·군자·원곡·고잔역을 폐쇄하고
한대앞역까지 운행을 단축시켰으며,
마침내 95년 12월 31일 저녁 8시,
사리·야목·어천을 거쳐
시발점이자 종착점인 수원역으로 돌아온
수인선 꼬마열차는 마지막 업무를 수행하고
의왕시 철도박물관에서 영면(永眠)에 들어갔다.
58년 4개월이란 과거로의 긴 시간여행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애써 버릴 수밖에 없었던
간절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누적되는 적자를 극복하는 방법에는
민간기업에 불하하여 관광열차로 개발하거나
철도문화재로 지정해서 옛날처럼
증기기관차로 '칙칙폭폭' 달리는 모습을
관광상품으로나마 후손에게 전했으면 했던
소망까지 신기루처럼 날아가 버렸다.
없어지면 다시 만들기 어렵다는 것을,
사라지는 것은 아쉬우나
사라진 것들은 더욱 그립다는 진리를
우리는 이제서야 비로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우리는 아직고 작고 아담한 체구(?)로
협궤를 달리던 당당했던 그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뒤뚱거리면서도 최고속도 50km/h를 자랑하며
지역주민에게는 다정한 벗으로 발이 되었고,
소래포구를 찾은 가난한 연인(戀人)에게는
정감이 듬뿍스민 데이트 코스로서
충실하게 그 역할을 다했던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객차 안에서는 간간이 물물거래가 이뤄지고,
역원 무배치역에서 승차한
손님에게 표를 발매하고 개찰하는
승무원의 밝은 표정은
마치 마을열차(?)같이 푸근하고
친근했던 마음들이었다.
생선 바구니에 고단한 삶의 무게를 짊어진
포구(浦口) 아낙들의 질박한 바람을 싣고,
술에 취한 시골 노인들의
절절한 가락을 곁들이면서
현대화에 밀려 숨가쁘게
도시의 뒤안길을 달려온 수인선.
간이역이 아니더라도
지나는 열차에 손만 흔들면
언제든지 바로 세워 주었던 인정 어린 열차.
원곡 고갯길에서는 힘이 달려
승객들이 내려야만 다시 헉헉대며 오르던 일.
버스와 트럭이 부딪혔을 때는
저 혼자 넘어져서 길게 누웠던 치욕의 눈물을
가느다란 기적소리에 담아 흩뿌리며
허공 속으로 삼켜버렸으나
마침내, 마침내 수인선은
철도의 초라한 서자(庶子)라는 큰 멍에를 짊어진 채
천천히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지며
아득하게 멀고도 먼
추억의 터널 속으로 서서히 잠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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